첫장과 마지막장이 비어있는 책 탈무드
탈무드는 계획 완성되어 가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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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 신언자, 율법학자들의 논쟁집 탈무드. 이스라엘 민족의 지식의 집합체. 교육의 바이블. 탈무드는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쌓이고 쌓인 토론과 논쟁을 모아놓은 집성체이다. 오랜 세월동안 정리된 현인들의 대화가 수록된 만큼 그야말로 유대인들의 지혜와 지식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종교, 경제, 의학, 행복, 유머, 평화, 전쟁, 죽음 등 인생에 관한 수많은 대화가 세밀히 담겨 있다. 삶의 모든 영역에 걸친 문제들을 폭넓게 다루기 때문에 한 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라 평생 연구해야 할 경전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방대한 양의 서적을 제대로 한번 읽는데만도 7년반이 소요된다.
한가지 재밋는 사실은 탈무드가 완성된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구한 과거부터 계속 업데이트가 되어 왔고 지금또한 계속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탈무드의 첫장과 마지막장은 비어있다. 첫장이 비어있다는 것 또한 이 책이 우리의 삶의 과정중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또 탈무드의 공부자체또한 별도의 시작이 없는 중간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신의 상태에서 바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듯 하다.
탈무드의 저자들은 탈무드 자체가 특수한 비수를 특정 집단에게 전수하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인류 보편에 다가가려고 했던것 같다. 즉, 이 이야기들이 학자들에게 전수되기 보다 일반인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전통적 교육체제에 따르면 초등학교 중급학년부터 탈무드 연구를 시작하게 되고 점차 더 깊은 분석수준을 거쳐 최고 수준의 학문적 연구단계로 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 체제의 목표 중 한가지는 학생의 내면에 탈무드에 대한 맛을 느끼게 해 줌으로써 탈무드 연구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게 하려는 것이다. 즉 탈무드는 유대인 교육체제의 거의 모든것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의 탈무드 공부법
유대인들은 아침과 저녁 하루 두번 회당에서 기도회를 갖는데 기도회가 끝나면 별도의 토론공간에서 두셋씩 짝을 지어 탈무드를 공부한다. 우선 본문을 가지고 토론을 시작하는데, 한사람이 본문을 해석하면 다른 한사람이 이에 대해 반박하고 논쟁한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역할을 바꾸어 질문했던 사람이 해석하고 반대편이 다시 질문하는 형태로 진행한다. 이어서 두 사람은 각자 발췌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분투하고 보다 큰 이슈와 자기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토론한다. 이런 식으로 일상화된 토론과 논쟁은 유대인의 뇌를 마치 칼을 예리하게 갈듯이 단련해 왔던 것이다. 탈무드 공부는 어릴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평생 임종전까지 한다. 대표적인 유대인인 상대성 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임종 직전까지 아이디어 노트에 기록하는 것을 놓지 않은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유대인은 처음에는 부모와 함께 하루 두세장씩, 그리고 더 나이가 들면 7년마다 한번씩 일독을 하며 평생을 공부하는데 이 과정을 거듭하면서 체계적인 사고력과, 논리력, 창의력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 단순한 기록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유대인의 탈무드 공부법의 핵심이다.
무엇이든 지겨워지면 지속해 나갈수 없게 된다. 배우는 것을 즐기라고 유대인들은 어릴때부터 강조하는데, 일례로 유대인이 세살이 되면 히브리 알파벳을 깨치기 위해서 꿀로 적은 글자를 핥도록 한다. 그만큼 배우는 것은 달콤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전통적인 교육법이다.
유대인의 교육의 목표는 짧지 않다. 한국의 경우는 좋은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모든 교육의 목표이다. 결국 대학진학이 이루어 진 후에는 목표상실로 인해 방황을 겪는 대학생들을 쉽사리 볼 수 있다. (물론 요즘은 최종 목표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더 높은 교육기관에 가면 더 좋은 배움을 가질수 있다고 생각하고 배움은 평생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해서도 진지하게 학습을 이어나간다. 따라서 어릴때 성적이 좋지 못하고 성격이 원만하지 못한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좋은 예이다. 그는 어릴때 성적도 지지부진했고, 성격도 다른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하지만 끊임없는 관심으로 결국 대성한 예이다. 만약 그가 한국에 태어났더라면 사회적 문제아로 왕따를 당해 자살하거나, 다른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생을 마감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대인 사회에서 태어나 그는 세계적 물리학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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